해어화(解語花)의 지조와 절개의 꽃 '기생초'
해어화(解語花)의 지조와 절개의 꽃 '기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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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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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가장 무더운 달이다.

연중 기온과 습도가 가장 높아 사람들이 잠들지 못하는 열대야가 지속되고 열사병 같은 더위 관련 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달이지만 식물들에게는 좋은 결실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때로 뜨거운 햇볕과 비는 가장 큰 축복이 되는 시기이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온다는 이치와 같이 지독한 폭염은 여름이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을에게 그 자리를 내어 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런 자연의 순환과 섭리는 우리의 삶의 여정에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우리 민족에게는 8.15 광복과 8.29 경술 국치의 치욕이 함께 있는 달이어서 국권을 빼앗겨 역사상 초유로 일제의 식민지가 된 날과 , 해방의 기쁨을 맞은 날이 모두 같은 달에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 무렵 주변에서 가장 많이 피는 꽃이 금계국과 `기생초`이다. 둘다 국화과의 같은 속에 속하는 식물이며 북미가 고향인 귀화식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 `기생초`1~2년 생의 식물로 키는 30~100cm 정도이며, 꽃은 지름이 2~5cm의 두상화로 꽃잎이 6~8개의 설상화로 끝이 얕게 갈라진 형태이다. 색은 진한 노란색이고 중앙부에 짙은 검붉은 색의 무늬가 있는 종이 많으나 종종 꽃잎 전체가 진한 붉은 색을 띄는 개체도 볼 수 있다. 잎은 가늘고 긴 줄 모양이며 중간이 갈라지는 형태로 자라고 개화 시기는 7~10월이다. 원래는 관상용으로 들여 온 것으로 추정되나 야생으로 퍼져 나가 여름 꽃의 대표 반열에 오를 정도로 번성한 꽃으로 번식력과 적응력이 강한 것은 다른 귀화식물과 같다.

`기생초`란 이름의 유래는 옛날 기생들이 외출시에 쓰던 종이로 만들어 색을 칠한 갓을 일컫는 전모를 닮아 붙여졌다는 설과, 잎이 여리고 줄기가 가늘며 화사한 노란색의 꽃 중심부에 강한 포인트를 주듯, 자리한 흑적색의 무늬가 진하게 화장을 한 고혹적인 기생의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후자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되었든 폭염속에 지친 사람들에게 강렬한 색조를 띤 유혹의 손짓을 보내는 것 같은 `기생초`의 모습에 잠시 더위를 잊고 그 매력에 빠져 보기도 한다. 비슷한 이름으로 `기생꽃`이 있으나 이는 종이 다른 일곱개의 고운 흰 꽃이 피는 우리나라 고산 지대에 주로 서식하는 식물로 만나기 어려운 종이다.

기생이란 신분은 고대로부터 전쟁의 전리품으로 남자포로는 노예로, 부녀자는 유녀 및 노비로 삼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며, 하나의 신분으로 정착 된 것은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부터 기생은 춤,노래, 기악, 학문,그림,,용모,화술 등을 갖춘 종합 예술인으로 교육, 선발되어 왕실의 행사나 귀족의 행사에 동원되었으며 이들을 관리하는 관청도 있는, 나름의 인텔리 집단으로 당시 여인들에게는 드물었던 글을 아는 꽃이란 의미의 해어화라 불리기도 했고, `매창불매음`(노래는 팔되 몸은 팔지 않는다)의 강령도 있었다. 신분은 중인 정도의 대접을 받았고, 결혼도 할 수 있었으며 남편이 있는 기생도 있었다. 매음을 하는 여자는 천민으로 창기라는 신분을 가져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생의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러한 기생의 신분적 변화는 조선말기의 사회적 타락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몸을 파는 여자와 동일시 되어 오늘 날 까지 잘못된 평가를 받고 있다.

지조와 절개를 지킨 역사 속 인물도 많이 있으며 당대의 석학들과 시문을 겨룬 이도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평가가 무지에서 비롯 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매향` `황진이` `장연홍` `논개`등 유명인도 많았으며 그 중 조선 말 평양기생인 장연홍은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친일파 이지용이 돈으로 첩을 삼으려 하자 나라를 욕보인 자에게 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21살의 나이에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 행방 불명 된 삶을 보낸 인물로 기생의 기개와 지조의 표상을 보여 주기도 했다

8월이 주는 역사적 의미에서 한나라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될 때, 당시 나라를 이끌던 지도층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우리는 을사오적을 민족사에서 가장 나쁜 인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바른 역사적 평가일까? 그 을사오적을 임면하고 요직에 발탁한 조선왕조의 통치방법에 대해 더 큰 책임과 무능을 꾸짖고 다음으로 을사오적을 단죄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중매체나 예술공연에서 왕조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을사오적은 천하역적으로 묘사되는 현실은 과연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뼈저린 역사를 제대로 분석하고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물론 필자도 을사오적이 민족사에서 가장 악질이라 생각하지만, 세계정세의 변화와 발전에 눈과 귀를 닫고 끼리 문화에 빠져 파벌싸움에 몰두한 세칭 당시 지도층과 왕조에게 더 큰 책임을 묻고 냉정한 평가와 단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요즈음도 자신의 탐욕을 교묘히 감추고 권력을 좇는 세칭 폴리페서라 불리는 교수들의 곡학아세와 자기합리화, 검증과 토론 없는 이론의 주장과 실험, 외눈박이 정치인들의 조변석개, 아전인수, 패거리 의리, 철면피 같은 탐욕, 공직자들의 복지부동, 권력의 눈치보기, 무사안일, 권위의식, 언론계의 세칭 기레기 들의 침소봉대, 본말전도, 왜곡을 포장하는 편집기술, 용비어천가 난무 등의 행태를 보면 옛 기생들 만큼의 지조와 절개도 갖추지 못하고, 권력과 사욕을 쫒아 들개 무리처럼 몰려 다니는 지도층이라는 무리들의 행태들로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하게 할 것 같아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진다.

지난 날 우국지사나 진정한 민족과 사회의 어른이 많았다면 뼈아픈 치욕의 역사를 겪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기생초` 만발한 들녘에 서서 우리 지도자들이 역량 있던 옛 기생들의 지조와 기개의 반만이라도 본받고 실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자신도 스스로를 가다듬고 사회와 국가를 위한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고민 해야 하겠다.

무더위 속에 핀 `기생초` 그 기상이 새롭게 보이는 8월이다.

글- 사진_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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